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흐메트 2세 (문단 편집) === 정복군주로서 ===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함께 메흐메트 2세는 이곳을 수도로 삼은 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마자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스탄불로 개명했다는 것이 상식처럼 알려져 있는데, 오스만 제국이 멸망한 1923년까지 가장 널리 쓰인 이름은 '코스탄티니예'였다. 이스탄불도 안 쓰인 건 아니지만 코스탄티니예와 함께 쓰이는 여러 이름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으며, 이스탄불로 명칭이 통일된 것은 튀르키예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서였다.], 메흐메트는 로마는 멸망하지 않았다며 자신을 로마의 새로운 [[카이사르]](황제)와 [[로마]]의 [[제3의 로마|계승자]]라 칭하였다.[* 이때 내건 명분은 크게 두 가지인데, 자신이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도시를 수도로 하는 제국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과 선대 술탄인 [[오르한]]과 동로마 황녀가 결혼한 일이 있다. 즉, 동로마 황실과 오스만 황실은 서로 남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가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인 조이(Ζωή Παλαιολόγια)와 결혼한 것에 근거하여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내세운 적이 있다.] 이를 위해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을 통제하고[* 금지한 게 아니라 '''통제된 약탈'''로써 금전적 갈취와 노예화, 강간 등은 메흐메트 2세가 허락한 사흘 동안 엄청나게 자행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노예는 약 5만 명 정도이고, 하느님이 보호해 줄 거라 생각해 성당으로 피난간 사람도 엄청 많았지만 오스만 병사들에게는 그저 먹을 게 한곳으로 몰린 것뿐이다. 수녀나 아이라도 강간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다. 다만 약탈 이후의 도시를 보고 메흐메트 본인도 약탈을 허락한걸 후회하며 단 하루만에 ~~더 이상 털게 없기도 하고 해서~~ 금지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존에 존재하던 성당 등의 시설물을 성원(모스크)으로 개조[* 현재 이스탄불의 대표적 문화재인 [[아야 소피아]]도 이때 성원으로 개조되었다.]하는 동시에 기존 주민들 중 엘리트들의 신앙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하여 반항을 무마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자신이 무너뜨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새로운 대제국의 수도로 다시 재건하는 원대한 작업을 개시했다. 참고로 이전까지 오스만의 수도는 [[부르사]]와 [[에디르네]]였다.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전까지는 오스만 베이국의 영토가 콘스탄티노폴리스 때문에 유럽과 아나톨리아로 양분될 수밖에 없어서, 어느 한쪽에만 수도를 두었다간 통치가 어려웠기 때문. 따라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중심 도시이자 수도는 부르사, 유럽 지역의 중심이자 수도는 에디르네라는 식으로 운영해야 했고,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에디르네를 새로운 수도로 삼은 [[무라트 1세]]와 그 아들인 [[바예지트 1세]]는 에디르네보다 부르사 많이 머물렀으며, 에디르네가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메흐메트 1세]] 때부터다. 그 뒤 계속된 발칸 반도의 동로마 제후국 정벌로 오스만의 세력은 현재의 [[세르비아 공국]](1459)과 [[보스니아 왕국]](1462)을 합병하여 발칸 반도 서부 깊숙이에 미쳤고, [[드라큘라]] 공작으로 유명한 왈라키아 공작 [[블라드 가시공]]과 전투를 해서 초반에는 고전했지만 가시공의 아우 [[라두 3세]]를 포섭해 적의 분열을 유도, 결국 제후국으로 복속(1462)시켰다. 그 외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이전에 [[흑해]] 연안의 [[제노바 공화국|제노바]] 식민지를 평정하며 흑해를 오스만의 세력권으로 만들고 오스만 제국과 마찬가지로 [[룸 술탄국]]에서 떨어져나온 여러 튀르크계 공국들을 마지막 하나까지 멸하고 그 과정에서 [[카라만 후국]],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백양 왕조]] 샤한샤 [[우준 하산]]의 군대를 사실상 궤멸시켜 배후지를 안정시켰다. 이것이 1473년의 오틀룩벨리 전투(Otlukbeli Savaşı). 실제로 이후 오스만 제국이 동쪽 국경을 걱정하게 되는 것은 1501년에 백양 왕조의 뒤를 이어 [[사파비 제국]]이 들어선 다음의 일이다. 또 [[크림 반도]]의 [[몽골]]계 왕조인 [[크림 칸국]]을 굴복시켜(1476) 이후의 제후국으로 만들어, 연공을 받는 대신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이후 크림 칸국의 기병대는 몽골의 피를 이어받은 만큼 대단한 활약을 보이며 오스만 제국의 각종 군사 원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대가 되기에 이르렀으며, 이 관계는 이후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으로 관계가 단절될 때까지 이어진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을 원했던 러시아는 처음 한동안은 발트 해를 주목했으나 이후 흑해로 눈을 돌렸고, 결국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1774년의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Küçük Kaynarca Antlaşması)으로 크림 칸국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후 독립국일 터인 크림 칸국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고, 비록 독립은 시켜주었으나 여전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이에 항의. 결국 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벌어졌으나, 이번에도 오스만 제국이 패배했다. 결국 오스만은 크림 칸국의 영토는 러시아 영토임을 인정해야 했고, 러시아는 즉시 크림 칸국을 멸하고 그 땅을 '타우리다 주(州)' 라는 이름으로 합병했다. 참고로 1688년의 빈 패배, 18세기 초반의 헝가리 상실로서 대 유럽 전선이 다시 [[베오그라드|벨그라드]]로 내려왔어도 오스만 제국 지도층이나 관료들은 애초에 헝가리까지 영구적으로 영유하는건 무리였다며, '''살다보면 질 수도 있지'''정도로 인식하고 오스만 제국이 다른 유럽 국가와의 경쟁력에서 밀리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고,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나머지 유럽 국가들도 18세기에는 전반적으로 오스만 제국이 전반적으로 약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강국 중 하나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 입장에서는 한때는 크림 칸국에게 수시로 털리던 러시아가 이렇게 커서 자신들을 패배시켰다는 점에서 대단히 충격을 받아 상술한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 이후부터 제국의 약화에 전국가적인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실제로도 이후 오스만 제국은 쇠퇴일로를 건기 시작했다.] 군사적 업적들 외에도 정복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한 각종 법률을 마련해 운영하도록 했고, 오스만 제국 건국 이래로의 튀르크계 귀족가문[* 이 귀족 가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메흐메트가 ‘스승님’으로 불러야 했던 할릴 파샤의 가문인 찬다를르 가문(Çandarlı family). 1364년에 처음으로 재상을 배출한 이래 할릴이 처형당하는 1453년까지 네 명의 재상을 배출했고, 그들의 임기를 모두 더하면 64년에 이른다. 오스만 제국이 창건된 때부터 헤아려도 대략 150년 가운데 60년을 이 가문이 해먹은 셈으로, 학자들 가운데에는 찬다를르 가문의 재산이 오스만 황가의 것보다도 더 많았으리라 보는 경우도 있다.] 대신 데브시르메 제도로 징집된 자들을 재상으로 임명함으로써 전제군주체제를 확립했다. 한편 1470년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 영토에 대한 공세를 시작해 에게 해에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세력을 몰아냈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의 패권은 동지중해까지 확장되었다. 베네치아가 이에 대항해 오스만 동부의 강국인 [[백양 왕조]]를 끌어들이자 1473년 친히 공격하여 대파하고 동부 방면의 패권을 확립했다. 또 1479년 알바니아 정복을 완료했으며, 이듬해에는 이탈리아 남부의 [[오트란토]]까지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